맨위로가기

피에르 1세 (키프로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피에르 1세는 1328년 키프로스 국왕 휴 4세의 아들로 태어나 1359년 키프로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으려는 야망을 품고 십자군을 조직하기 위해 유럽 각국을 순방하며 지원을 요청했다. 1365년에는 알렉산드리아를 약탈했으나, 유럽 기사들의 반대로 카이로 공격에는 실패했다. 그는 유럽 순방과 전쟁으로 인해 많은 재정이 필요했으며, 키프로스 농노들에게 자유를 살 권리를 부여하여 재정을 확보하려 했다. 1369년 1월 암살당했으며, 그의 뒤는 아들 피에르 2세가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4세기 키프로스 - 앙리 2세 (키프로스)
    앙리 2세는 1285년부터 1324년까지 키프로스 왕국의 왕이자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으며, 아크레 함락 후 사법 및 행정 시스템 개선에 집중했으나 간질로 통치력이 약화되어 왕위 찬탈 시도가 있었고, 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았으며 성전기사단을 해체했다.
  • 14세기 통치자 - 요안니스 5세
    요안니스 5세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으며, 긴 통치 기간 동안 내전과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대로 제국의 쇠퇴를 겪었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 되어 1391년에 사망했다.
  • 14세기 통치자 - 앙리 2세 (키프로스)
    앙리 2세는 1285년부터 1324년까지 키프로스 왕국의 왕이자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이었으며, 아크레 함락 후 사법 및 행정 시스템 개선에 집중했으나 간질로 통치력이 약화되어 왕위 찬탈 시도가 있었고, 구호기사단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았으며 성전기사단을 해체했다.
  • 니코시아 출신 -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
    키프로스 태생의 영국 경제학자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는 노동 시장과 거시경제의 상호 작용 연구에 기여한 공로로 2010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으며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레지우스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 니코시아 출신 - 마리노스 사치아스
    키프로스 출신의 은퇴한 축구 선수 마리노스 사치아스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아포엘 FC에서 8번의 리그 우승 등을 이끌고 키프로스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했다.
피에르 1세 (키프로스)
기본 정보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 피에르 1세
안드레아 디 보나이우토의 피에르 1세 초상화
왕위
왕국키프로스 왕국
통치 기간1358년–1369년
이전 통치자위그 4세
다음 통치자피에르 2세
배우자
배우자 정보에쉬브 드 몽포르 (1342년 결혼, 1350년 사망)
엘레오노르 다라곤 (1353년 결혼)
자녀피에르 2세 (키프로스)
마르그리트 드 뤼지냥
가문
가문푸아티에-뤼지냥 가문
부친위그 4세
모친알리스 디 이벨린
출생과 사망
출생일1328년 10월 9일
출생지니코시아, 키프로스
사망일1369년 1월 17일 (향년 40세)
사망지니코시아, 키프로스
종교
종교가톨릭교

2. 초기 생애와 즉위

피에르는 1328년 니코시아에서 키프로스 국왕 휴 4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휴 4세의 첫째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기는 부르봉의 마리와 결혼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기의 아들 또한 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왕위는 피에르에게 돌아갔다. 피에르는 1359년 11월 24일 니코시아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리마솔의 기, 주교에 의해 키프로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1349년, 피에르는 형제 존과 함께 비밀리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일은 그들의 아버지를 화나게 했고, 아들들을 찾아 다시 데려오기 위해 배를 보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피에르와 존은 아버지의 허락 없이 떠난 죄로 투옥되었다. 레온티오스 마차이라스는 피에르와 존이 3일 동안 갇혀 있었다고 말했지만, 윌리엄 드 마쇼는 피에르가 두 달하고 9일 동안 투옥되었다고 말했다.

1360년 4월 5일에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목상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했다. 1291년 아크레 함락 이후, 키프로스는 중동에서 기독교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다. 피에르는 자신의 왕국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사명이 이슬람과 싸우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루지냥 가문이 여전히 주장하는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으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2. 1. 출생과 가족 배경

피에르는 1328년 니코시아에서 키프로스 국왕 휴 4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이벨린의 앨리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휴 4세의 첫째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기는 부르봉의 마리와 결혼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1349년, 피에르는 형제 존과 함께 비밀리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아버지 휴 4세의 분노를 사, 귀국 후 투옥되기도 했다. 레온티오스 마차이라스는 이들이 3일 동안 갇혀 있었다고 기록한 반면, 윌리엄 드 마쇼는 피에르가 두 달하고 9일 동안 투옥되었다고 주장했다.

2. 2. 키프로스 및 예루살렘 왕위 계승

피에르는 1328년 니코시아에서 키프로스 국왕 휴 4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휴 4세의 첫째 아들 기가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피에르는 1359년 11월 24일 니코시아의 성 소피아 성당에서 리마솔의 기, 주교에 의해 키프로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1349년, 피에르는 형제 존과 함께 비밀리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으나, 이 일로 아버지의 분노를 사 투옥되기도 하였다.

1360년 4월 5일에는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목상 예루살렘 국왕으로 즉위했다. 1291년 아크레의 함락 이후, 키프로스는 중동에서 기독교의 마지막 거점이 되었으며, 피에르는 자신의 사명이 이슬람과 싸우는 것이라고 믿고 예루살렘 왕국을 되찾으려는 야망을 품었다.

3. 결혼과 자녀

1342년 6월 28일 직후, 피에르 1세는 험프리 드 몽포르(1305년 ~ 1326년 6월 24일)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에시바 드 몽포르와 결혼했다. 험프리 드 몽포르는 키프로스 총사령관이자 토론의 명목상 영주였으며, 에시브 드 이벨린의 딸이었다. 에시바는 피에르 1세가 십 대였을 때인 1350년 이전에 사망했고, 이 결혼은 자녀가 없었다.

피에르 1세는 1353년 아라곤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는 아라곤의 인판테 페드로와 잔 드 푸아의 딸이었다. 엘레오노르는 1358년 11월 24일 키프로스 여왕으로, 1360년 4월 5일 예루살렘 여왕으로 즉위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엘레오노르에 대한 피에르 1세의 열정을 기록했는데, 마카이라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피에르 1세는 항상 엘레오노라의 잠옷을 품에 안고 잤다고 한다.

피에르 1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는 피에르 2세, 마가렛, 에시바 등의 자녀가 있었다. 키프로스의 피에르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면서, 키프로스 왕위는 피에르 1세의 삼촌인 키프로스의 자크 1세에게 넘어갔다.

3. 1. 첫 번째 결혼: 에시바 드 몽포르

1342년 6월 28일 직후, 피에르 1세는 험프리 드 몽포르(1305년 ~ 1326년 6월 24일)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에시바 드 몽포르와 결혼했다. 험프리 드 몽포르는 키프로스 총사령관이자 토론의 명목상 영주였으며, 에시브 드 이벨린의 딸이었다. 에시바는 피에르 1세가 십 대였을 때인 1350년 이전에 사망했고, 이 결혼은 자녀가 없었다.

3. 2. 두 번째 결혼: 아라곤의 엘레오노르

피에르 1세는 1353년 아라곤의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엘레오노르는 아라곤의 인판테 페드로와 잔 드 푸아의 딸이었다. 엘레오노르는 1358년 11월 24일 키프로스 여왕으로, 1360년 4월 5일 예루살렘 여왕으로 즉위했다. 연대기 작가들은 엘레오노르에 대한 피에르 1세의 열정을 기록했는데, 마카이라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피에르 1세는 항상 엘레오노라의 잠옷을 품에 안고 잤다고 한다.

피에르 1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에는 피에르 2세, 마가렛, 에시바 등의 자녀가 있었다. 키프로스의 피에르 2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면서, 키프로스 왕위는 피에르 1세의 삼촌인 키프로스의 자크 1세에게 넘어갔다.

4. 대 튀르크 전쟁

검의 기사단(1347년)


1291년 아크레의 함락으로 근동 본토의 마지막 기독교 십자군 거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키프로스는 인접한 무슬림 세력에게 잠재적인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잔존 세력에 주목하고 있었고, 그들은 주로 육상 세력이었기에 이 지역에 남아있는 라틴 기독교 세력들은 바다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성 요한 기사단과 함께 키프로스 왕들은 십자군 전통의 주요 계승자였다. 피에르 1세는 1347년에 검의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이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것이었다.

피에르 1세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소아시아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1360년 1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요새화된 항구인 코리코스 주민들이 튀르크족의 위협을 받자 피에르 1세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피에르 1세는 기사 로베르토 드 루이시냥이 이끄는 병력을 보내 코리코스를 지켜냈다.

코리코스 포위는 소아시아의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위협으로 여겨져 그들은 연합하여 키프로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피에르 1세는 성 요한 기사단 등의 지원을 받아 120척의 함대를 소집, 1361년 8월 23일 안탈리아에 상륙하여 다음날 도시를 정복했다. 이후 이 지역의 에미르들은 피에르 1세에게 조공을 바쳤다. 안탈리아의 에미르인 테케는 도시를 되찾기 위해 공격해 왔으나, 키프로스군은 도시를 지켜내고 미레스 지역의 경비병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4. 1. 십자군 정신과 검의 기사단



1291년 아크레의 함락으로 근동 본토의 마지막 기독교 십자군 거점이 사라진 상황에서, 키프로스는 인접한 무슬림 세력에게 잠재적인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확장하는 오스만 제국은 비잔틴 제국의 잔존 세력에 주목하고 있었고, 그들은 주로 육상 세력이었기에 이 지역에 남아있는 라틴 기독교 세력들은 바다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성 요한 기사단과 함께 키프로스 왕들은 십자군 전통의 주요 계승자였다. 피에르 1세는 1347년에 검의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이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것이었다.

피에르 1세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요새화된 항구인 코리코스 공격을 시작으로, 소아시아 해안을 따라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1360년 1월, 코리코스 주민들은 튀르크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요청했고, 피에르 1세는 로베르토 드 루이시냥이 이끄는 병력을 파견하여 코리코스에 대한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코리코스 포위는 소아시아의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위협이 되었고, 그들은 연합하여 키프로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피에르 1세는 성 요한 기사단 등의 지원을 받아 120척의 함대를 소집했다. 1361년 8월 23일, 키프로스군은 안탈리아에 상륙하여 8월 24일에 도시를 정복했다. 이후 이 지역의 에미르들은 피에르 1세에게 조공을 바쳤고, 피에르 1세는 1361년 9월 22일 키프로스로 귀환했다. 안탈리아의 에미르 테케는 도시를 되찾기 위해 공격했지만, 키프로스군은 도시를 지켜냈다.

4. 2. 소아시아 원정



피에르 1세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소아시아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했다. 1360년 1월,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의 요새화된 항구인 코리코스 주민들이 튀르크족의 위협을 받자 피에르 1세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피에르 1세는 기사 로베르토 드 루이시냥이 이끄는 병력을 보내 코리코스를 지켜냈다.

코리코스 포위는 소아시아의 무슬림 지도자들에게 위협으로 여겨져 그들은 연합하여 키프로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피에르 1세는 성 요한 기사단 등의 지원을 받아 120척의 함대를 소집, 1361년 8월 23일 안탈리아에 상륙하여 다음날 도시를 정복했다. 이후 이 지역의 에미르들은 피에르 1세에게 조공을 바쳤다. 안탈리아의 에미르인 테케는 도시를 되찾기 위해 공격해 왔으나, 키프로스군은 도시를 지켜내고 미레스 지역의 경비병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5. 유럽 순방과 십자군 원정

피에르 1세는 키프로스 왕위 계승 문제에 직면하여, 조카 위그가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아 교황에게 왕위를 요구하자 직접 교황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1362년 10월 말, 파포스를 출발하여 로도스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환대를 받았고, 아비뇽에서 교황을 만나 왕으로 인정받았다.

피에르 1세는 성지예루살렘 왕국을 해방하기 위한 십자군을 조직하고자 유럽의 강력한 통치자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 독일 왕국, 프랑스 왕국을 여행했으며, 잉글랜드 방문 중에는 다섯 왕의 연회에 참석했다.

또한 제노바, 베네치아, 프라하, 크라쿠프와 같은 도시들을 방문했다. 폴란드 왕의 초청으로 카를 4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헝가리 왕 러요시 1세,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 등이 참석한 크라쿠프 회의에 참여하여 기사도의 위업을 달성, 왕실 토너먼트(중세)에서 우승했다. 런던에서는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프랑스 왕국, 덴마크의 왕들을 만났으나, 이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십자군에 참여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한편, 피에르 1세는 제노바와 협상하여 제노바의 키프로스 식민지인들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5. 1.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피에르 1세는 키프로스 왕위 계승 문제에 직면하여, 조카 위그가 프랑스 왕의 지원을 받아 교황에게 왕위를 요구하자 직접 교황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1362년 10월 말, 파포스를 출발하여 로도스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환대를 받았고, 아비뇽에서 교황을 만나 왕으로 인정받았다.

피에르 1세는 성지와 예루살렘 왕국을 해방하기 위한 십자군을 조직하고자 유럽의 강력한 통치자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는 잉글랜드, 독일, 프랑스를 여행했으며, 잉글랜드 방문 중에는 다섯 왕의 연회에 참석했다.

또한 제노바, 베네치아, 프라하, 크라쿠프와 같은 도시들을 방문했다. 폴란드 왕의 초청으로 카를 4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헝가리 왕 러요시 1세,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 등이 참석한 크라쿠프 회의에 참여하여 기사도의 위업을 달성, 왕실 토너먼트(중세)에서 우승했다. 런던에서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프랑스, 덴마크의 왕들을 만났으나, 이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십자군에 참여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한편, 피에르 1세는 제노바와 협상하여 제노바의 키프로스 식민지인들이 가질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5. 2.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1365년)

피에르 1세는 아버지 위그 4세가 사망한 후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본격적으로 계획했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원정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1365년 10월 11일, 피에르는 키프로스군과 서방 십자군으로 구성된 70척의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를 약탈했다.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참조). 그러나 유럽 기사들이 카이로 공격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여, 피에르는 키프로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원정의 유일한 영구적인 결과는 이집트 술탄과의 적대감이었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기독교 상인들에 대한 보복이 이어졌고,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유럽 군주들 사이에서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후, 피에르에게 술탄과 평화 협정을 맺으라고 조언했다.

5. 3. 레바논 및 시리아 공격

피에르는 십자군 원정을 계속하여 베이루트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인들의 개입으로 군사 작전을 중단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피에르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막대한 보상금을 제안했다. 1366년 1월에는 트리폴리를 습격했다. 1368년 다시 유럽에서 병력을 모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교황 및 베네치아인과 함께 이집트와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중동과의 교역은 키프로스에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피에르 때문에 파마구스타는 지중해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술탄은 알렉산드리아 함락이라는 모욕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피에르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트리폴리 공격은 술탄에게 평화 협정에 동의하고 교역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계속되는 공격을 받든지 하라는 명확한 메시지였다. 술탄은 소아시아의 에미르들을 강화하고 코리코스를 공격하기 위한 군대를 소집했다. 피에르는 코리코스의 수비대에 새로운 병력을 증원했고, 그들은 터키의 공격을 격퇴했다. 1367년 5월, 안탈리아의 수비대는 임금 지급 지연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켰고, 피에르는 그곳으로 가서 질서를 회복하고, 반란의 주동자들을 참수했다.

카이로의 술탄과 평화를 맺기로 합의했지만, 결국 서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367년 9월 말, 시리아 해안에 대한 다른 공격이 있었고, 타르투스바니야스를 포함한 시리아 해안의 트리폴리 및 기타 도시를 재탈환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침략군은 폭풍 때문에 라타키아에 상륙할 수 없었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아야스를 공격하려 했지만, 근처 성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파마구스타로 돌아와 시돈을 습격하여 세 척의 상선과 키프로스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선박을 나포했다. 레온티오스 마카이라스는 피에르가 트리폴리를 지킬 수 없었던 이유는 그 도시에 성벽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6. 재정

피에르 1세는 유럽 순방과 전쟁을 위해 많은 재정이 필요했다. 높은 국가 수입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키프로스 농노들에게 자유를 살 권리를 부여했다. 이 정책으로 많은 키프로스인들이 혜택을 보았다. 또한, 이슬람 레반트에 대한 약탈을 통해 수입을 얻었다.

7. 암살과 죽음

피에르 1세는 로마에 있는 동안 아르메니아의 남작들로부터 자신을 왕으로 임명하고 그들의 나라를 구원해 달라는 호소를 받았다. 키프로스로 돌아온 그는 국내 문제에 빠졌다. 엘레노어 여왕은 그가 유럽에 오래 부재한 동안 부정행위를 했고, 그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귀족들을 학대하여 보복했고, 그의 형제들을 소외시켰다. 1369년 1월 17일, 그는 니코시아의 라 카바 궁전 침실에서 세 명의 기사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기사도와 십자군 열정은 그를 기사도의 전형으로 여겨지게 했다. 그는 키프로스 왕들의 전통적인 매장지인 니코시아의 성 도미니크 교회에 묻혔다. 그의 뒤는 아들 피에르 2세가 이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